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7대 대통령 선거 (문단 편집) === [[한나라당]] === [include(틀:한나라당 제17대 대통령 후보 경선)] ---- 한나라당은 [[박근혜]] 전 대표 취임 이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 역풍에도 121석을 거두며 선방했고, [[2005년 재보궐선거|200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부터는 모든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고 있었다.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그 화룡점정으로 이를 시작으로 여권은 붕괴하기 시작했고, 야당은 박근혜 전 대표를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명박]]은 4년의 [[서울특별시장]] 임기 동안 청계천 복원과 시내버스 체계 전면 개편 등 굵직한 사업을 성공시켜 대권후보로 거론되었고, [[손학규]]도 [[경기도지사]]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때 이명박, 박근혜, 손학규를 빅3라고 불렀다. 단, 빅3 중 손학규의 [[인지도]]나 지지율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물론 아주 [[듣보잡]] 후보 수준은 아니었으나, 3년여간 당대표를 역임하며 탄핵 역풍으로 궤멸당한 당을 재건한 박근혜 전 대표나 시내버스 개편, 청계천 복원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등 행정적 업적을 세운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 비해 손학규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마땅치 않았다. 손학규도 경기도지사 시절 [[판교테크노밸리]]를 비롯하여 여러 대기업들을 [[경기도]]의 [[산업단지]]들에 유치하는 등 성공적으로 도정을 수행했으나[* 손학규는 경기도지사였을 때 노무현을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일명 '경포대') 매도하여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는데, 이는 '나는 대기업들을 경기도에 유치하여 경기도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였는데, 노무현은 경제 분야에서 한 게 없다'라는 인식에서 나온 발언이라고 해석된다.], 박근혜나 이명박에 비하면 이른바 '''뉴스를 탈 성과'''는 딱히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도지사로서는 성공적이었으나, 도지사직을 발판으로 대권에 도전하기 위한 모습은 보여주지 못한 것이었다. 손학규는 경기도지사 퇴임 직후 민심 100일 대장정 등의 행보를 보이며 어떻게든 지지율 반등을 위해 노력했으나, 이명박과 박근혜의 강력한 철옹성을 넘기 힘들었고, 결국 2007년 3월 19일 한나라당 탈당을 선언한다. 이로서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은 이명박과 박근혜의 양자 대결로 좁혀진다. 이 2명 외에, 당내 중진이었던 [[홍준표]] 당시 국회의원과 당내 소장파의 필두였던 [[원희룡]] 전 의원이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에 참여했다. 참고로 당시 홍준표는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때 서울특별시 동북권에서 [[당선]]된 유일한 한나라당 정치인이라는 점, 당내 혁신위원장을 맡았다는 점, 그리고 본인 특유의 독특한 캐릭터 때문에 정치적 지분에 비해 대중들 사이의 인지도 매우 높은 편이었다. 물론 둘은 실제 대권보다는 차기 당권이나 인지도 상승 등을 위한 것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그밖에 역시 소장파인 [[고진화]] 전 의원도 경선에 참여했으나, 경선 과정에 문제를 제기하며 후보를 사퇴했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당 내 경쟁은 치열했다. 초반에는 [[박근혜 피습 사건]] 와중에도 '''대전은요?''' 한 마디로 [[대전광역시장]] 승리를 이끈 박근혜에게 유리하다고 생각되었다. 당시 한나라당에게 있어 박근혜는 위기에 처한 당을 구하고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끈 구세주였기 때문이다.[* [[이이제이의 만화 한국현대사]]에서는 당시의 박근혜를 한나라당의 '[[예수 그리스도|예수 그네스도]]'로 묘사한다.] 그러나 [[북한의 1차 핵실험]]과 [[2007년 재보궐선거]]가 [[박근혜]]에게 악재가 되었다.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던 박근혜였지만, 2006년 10월에 발생한 북한의 1차 핵실험으로 인해 여성보다는 남성이 외교안보 업무를 총괄하는 대통령직에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한나라당 지지층 사이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박근혜의 지지세가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정작 [[이명박]]은 [[기관지 확장증]]으로 인해 병역을 면제받아서 군 경력은 없지만 남성이 여성보다 돌발 상황에 있어서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대응할 것이라는 사회적 고정 관념 또한 일정 부분 작용하였다.][* [[제13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일어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북한의 KAL기 테러]]도 비슷한 효과를 냈다. 민간인인 [[김대중]]이나 [[김영삼]]보다는 군 장성 출신의 [[노태우]]가 국군 통수권자인 [[대한민국 대통령]]에 더 적합하다는 인식이 퍼져 노태우가 승리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또한, [[2007년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이 부진한 성적을 내면서 박근혜는 또 한번의 타격을 입게 되었다. 수도권 기초자치단체장들은 공천 불복 탈당파에 의해, 대전광역시 서구 국회의원 선거는 국민중심당+열린우리당의 비공식적 연대에 부딛혀 패한 것. 박근혜는 당헌당규상 대권-당권 분리 및 대선 후보 경선 참여 1년 전 대표직 사퇴 조항에 따라 2006년 6월에 당대표직을 사퇴한 상황이었지만,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친박]]으로 분류되던 [[강재섭]]이었고, 박근혜가 전면에 나선 선거였기에 그 책임론까지 덤터기 써버린 것이다. 아울러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전략적으로 [[수도권(대한민국)|수도권]] 후보론, 경제 후보론이 나오는 실정이었다. 우선 수도권 후보론은 표가 많은 수도권을 정치적 근거지로 하는 인물을 내보내 수도권의 승기를 잡아야 한다는 것으로 영남은 누가 봐도 몰표가 쏟아지는 표밭이었으니 [[TK#s-1|TK]] 기반의 박근혜보단 역시 TK 출신이지만 [[종로구]]에서 국회의원을 한데다가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한 이명박을 내보내는 것이 총 득표에 유리할 것이라는 인식이었다. 영남이야 어차피 누가 후보가 되더라도 받는 표가 거진 동일할 테니[* [[공화당(미국)|미국 공화당]]에서 후보를 선출하는 방식도 전통적으로 이런 식이다. 어차피 보수층들은 공화당을 지지할 것이니, 보수층에게만 어필하는 강경 보수 성향의 후보보다는, 중도표도 끌고 올 수 있는 온건 보수 성향의 후보를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미국)|미국 민주당]]도 상황은 마찬가지. 특히 [[미국]]은 선거인단 제도이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표를 받아도 사표가 될 수 있어 이런 현상이 더 심하다.], 경제 후보론은 당시 [[참여정부]]의 경제 실정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으로 [[현대건설]] 평사원으로 출발해 [[현대그룹]] 회장 자리를 거쳐 서울시장으로서 경제적 성과를 보여준 이명박이 본선에 더 유리하다는 논리였다.[* 박근혜는 당시 당대표만을 역임해서 경제 운영에 대한 능력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 때문에 이명박 측은 [[747 공약]][* '''7'''% 경제성장률, 10년 내 '''4'''만 달러 국민소득, '''7'''대 경제 강국]을 내걸어 경제 공약을 강조했고, 이를 의식한 듯 박근혜 측은 줄푸세 공약[* 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푸''')고, 법질서를 '''세'''우자는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이다. 당시 친박이었던 [[유승민]]이 기획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 줄푸세를 입안한 사람은 [[김광두]]다.]을 내걸며 맞섰다. 당시 상황은 '''당내 지지도'''는 박근혜가 앞섰고, 이명박은 [[서울특별시장]] 시절의 성공적인 시정 덕분에 '''여론조사 지지율'''이 앞선 상태였다. 둘의 우세한 분야가 다르고 정도도 비등해서 경선 룰에 따라서 승패가 갈릴 수도 있는, 그야말로 초접전이었다. [[파일:오로지진실만을말하시는분들.jpg]] ---- 이 때문에 서로를 향한 네거티브가 엄청났는데,[* 이전이나 이후에도 우리나라 대선때 이정도의 네거티브는 흔치가 않은 사례로 그나마 [[한나라당]] 경선때의 네거티브 수위를 비교할려면 [[제20대 대통령 선거]] 때 [[더불어민주당]] [[이재명]]과 [[국민의힘]] [[윤석열]]의 대통령 선거 싸움때 벌어진 네거티브 정도가 그나마 비교가 된다. 하지만 이쪽은 애초에 다른 정당이니만큼 그렇다쳐도 [[이명박]]과 [[박근혜]]는 '''[[한나라당|아예 같은 정당]]'''이었음에도 서로 어떻게든 치고 올라갈려는 모습이 임펙트로만 따지면 이쪽이 더 화제였다.] 이런 진흙탕 싸움 속에서 둘의 비리는 이때 다 수면 위로 올라왔다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상대방의 약점이란 약점은 모조리 들춰내어 공격하였다. 여담으로, 그 유명한 발언들인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저거 어떻게 쥐어박고 싶었어]]", "[[엄청난 검증의 쓰나미가 몰아닥칠 것입니다]]"도 이 때 생겨난 것이다. 이후 선거 직전까지 [[BBK 주가조작 사건|BBK 논란]]이 계속되고, 후술하겠지만, 느닷없는 [[이회창]]의 독자 출마로 보수 표 분열까지 우려되는 상황에서 [[이명박]] 측은 급히 [[박근혜]]에 SOS를 친다. 당시 이회창이 필사적으로 박근혜 영입에 나섰기 때문인데, 최종적으로 박근혜가 [[한나라당]] 잔류를 택하고 이명박 지지를 선언하면서 한나라당은 단일대오를 구축하게 된다. 친박계 [[곽성문]] 전 의원이 개별적으로 탈당해 이회창을 지지하고, [[박사모]]도 공식적으로 이회창 지지를 선언했지만, 어디까지나 소수의 이탈일 뿐이었다. '''최종적으로 이명박이 49.6%를 얻어 48.1%의 박근혜를 1.5% 차이로 따돌리며 접전 끝 승리를 거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당시 서로를 향했던 네거티브 폭로전은 모두 '''명백한 사실'''로 밝혀졌다. 이명박 측에서 주장한 [[최태민]] - [[최순실]] 의혹은 [[박근혜와 최태민의 부적절한 관계]]가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발전하면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박근혜 재판]]에서 비로소 사실로 밝혀졌으며, 이명박의 재산 형성 의혹, [[BBK 주가조작 사건]], [[다스 실소유주 논란]] 등 역시 2020년 [[이명박 재판]]에서 대법원에서 유죄로 판결 확정이 나면서 역시 사실로 확정되었다. [[http://news.jtbc.joins.com/html/549/NB11976549.html?log=jtbcnewsindex_newsN_B|13년 전 이명박-박근혜 '경선 폭로전'…모두 사실로]] 결국 두 사람 모두 [[문재인 정부]] 들어 상기 혐의들로 유죄가 확정되면서 수감되었다. 그리고 이 두 사건을 [[박영수 특검]]과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수사한 [[윤석열]]은 다음 대통령이 되었고, [[한동훈]]은 [[법무부장관]]이 되었으며, [[이복현]]은 [[금융감독원장]]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